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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각자도생 사회에 살고 있는가?

김평수 연구소장

각자도생(各自圖生) 사회라고 한다. 2018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대학교수들이 가장 많이 선정한 말이 ‘각자도생’이라 했다. 올해 벽두에도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도 현 한국사회를 표현하는 말로 ‘각자도생 사회’를 꼽았다고 언론이 전했다. 한편으로 한국의 출생률이 0.98명으로 세계최초로 0명대로 들어섰다 한다. 결혼포기와 출산포기가 표면적 원인이라면 근원적 원인은 집사기 힘들고 아이 키우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 알아서 제 살길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이 각자도생이다. 그만큼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2018년 1인당 국민소득이 3만1천 달러를 넘어섰고 언론이 전한다. 살기 힘들다 하면서 한편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는 모순되는 뉴스를 같이 보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장을 당연한 것을 기준으로 살아왔다. 저성장 상태에서 고성장 상태로 가는 사회를 팽창사회라고 한다. 성장하기 위해선 상품을 만들어 팔아야 하고 사람들은 소비해야한다. 그런데 수요보다 공급과잉이 되면 상품이 안 팔리게 되고, 팔리지 않으면 이윤이 없으므로 성장할 수 없다. 당연한 경제 원리다.

고대에도 팽창사회는 있었지만 자본주의적 팽창사회는 제1차 산업혁명 때부터 시작된다. 자본주의적 팽창사회는 필연적으로 공급과잉을 일으켰다. 공급과잉을 해소하는 방법은 파괴나 부채를 통한 경기부양 방식이었다. 공급과잉은 30년대 대공황, 70년대 오일쇼크. 90년대 후반 아시아 경제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일으켰다. 1,2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은 말할 것 없고 대부분의 국지전 또한 공급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벌인 파괴적인 방법이고 뉴딜 같은 대규모 경기부양책이나 양적완화는 부채를 통해 수요를 끌어올리는 방법이다. 현재 전 세계는 부채를 통해 금융자본주의 체제를 부양해왔지만 이제 한계에 달했다. 결국 수요가 줄면서 마이너스 성장하는 수축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20세기 초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예견한 그대로의 자본주의 양식의 위기다.

 

이런 세계적 성장 한계를 많은 국가들이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4차산업혁명이라는 첨단 기술을 통해 극복하려한다. 그러나 소수에게 첨단기술과 자본이 집약되는 4차산업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양극화뿐만 아니라 국가 간. 기업 간의 양극화를 더 극단적으로 심화시킬 것이다. 결국 불평등과 양극화가 계속 되는 한 지속성장을 전제로 한 팽창사회는 금세기에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한국의 불황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이 수출로 먹고 살고 세계화로 연동된 경제구조 때문이다. 공급과잉은 전 세계적 문제이고, 전 세계적가 수축사회로 진입중이기에 불황은 필연이다. 즉, 정부가 경기 부양책을 쓴다고 지표가 고무줄처럼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미시적 한국경제 현황만 두고 정부의 능력은 탓하는 이들은 대부분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런 세계적 맥락을 무시하고 있다. 같은 반 학생들이 모두 식중독에 걸려서 달리기를 할 수 없는데 달리기를 못한다고 따지는 격이다. 식중독에 걸렸으면 병원으로 가야지 힐책할 일이 아니다.

경제는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도 흔든다. 문화 현상은 모든 경제적 삶의 기표로 작동한다. 그래서 삶의 문제는 새로운 문화와 트렌드로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가 어려우면 붉은 립스틱이나 미니스커트가 유행했다거나 가족, 연인에 관한 멜로영화가 유행했다는 통계들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삶의 활기를 찾으려는 대중심리가 문화에 반영됨을 의미한다.

최근 유행하는 트렌드는 예전과 다른 맥락에 놓여 있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YOLO(You Only Live Once 당신의 인생은 오직 한번뿐) 같은 용어들을 보면 느껴진다. ‘소확행‘, ‘욜로’ 같은 문화현상에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보다 현재를 즐기려는 사람들 증가하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한다. 그래서 졸라매고 아끼지 않는다. 비싼 물건은 못 사도 가성비 좋은 물건들을 사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2년간 적금을 모아 2개월짜리 배낭 여행을 떠난다. 내 집을 못사니 전셋집이라도 꾸며서 만족하면서 산다는 식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비록 금전적 부자는 못되어도 취미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가져보며 살겠다는 ‘취미부자’들도 유튜브에 넘쳐나고 있다.

오늘날 여가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나 물건이 아니라 시간이다. 더 길고 오래 휴식 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개인의 능력이다. 휴식에 동반하는 물건 또한 장시간 소비 가능한 것들이 유행한다. 소유를 포기하고 있다. 임대나 구독하는 ‘공유경제’도 소유하지 않는 태도를 반영한다. 자동차도, 소프트웨어도, 책도 소유하지 않고 구독한다. 한번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은 소유보다 놀이와 경험을 통한 개인의 행복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등극시켰다.

‘욜로’나 ‘소확행’, ‘취미부자’라는 용어에서 꿈과 희망을 읽어버린 우리 시대의 좌절감이 읽힌다. ‘부자가 되거나 성공 할 수 없으니 그냥 작은 소비와 취미를 행복삼아 현실을 잊고 즐기자’는 말은 절망적인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대중들의 생존철학이다. 만성적 경제 위기와 청년실업, 경제적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절망감은 저출산, 비혼족, 1인가구 폭증, 혼밥, 혼술 같은 현상을 만들고 또 ‘욜로’나 ‘소확행’ 같은 생활양식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소녀와 고양이

당대의 한국사회가 ‘각자도생 사회’라 표현한 사람들은 단지 이런 현상만 해석했을 뿐이다. 현상에 담긴 대중들의 절망은 읽지 못했고 대안도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던 마르크스의 일갈은 아직도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이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진리다.

‘각자도생 사회’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사회란 개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공동 해결을 위해 이룬 공동체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되 거대한 문제에는 함께 대응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회란 ‘각자공생(各自共生)’을 의미한다. 각자가 알아서 제 살길을 도모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이미 ‘사회’도 ‘국가’도 아니다. 우리가 ‘사회’와 한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살고 있다면 결국 불평등과 양극화와 윤리와 인문 정신이 상실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의 본질인 “각자공생”의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각자도생은 공멸의 길이다. 우리는 아직 공생의 시대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

 

김수영이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잎으로 시대를 미리 깨닫는 민중을 은유했듯, 시대는 지식인들의 해석보다 당대문화가 먼저 말한다. 해석이 먼저 있고 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당대문화에는 이미 현실의 힌트가 담겨있다. 대중과 문화 현상을 이해하면 대중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서로 공생하는 대중과 문화는 얼마나 솔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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